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 탄트 (문단 편집) === UN 사무총장이 되기까지 === [[파일:U_Nu_with_U_Thant.jpg]] '''젊은 시절 우 누(U Nu)와 우탄트''' 교직 생활을 이어가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전범|일본군]]이 [[1942년]]에 침입하여 [[미얀마]]를 점령하게 된다. 당시 [[전범|일본군]] 수뇌부들은 탄트를 미얀마에 [[일본]] 교육을 정착시키기 위한 교육개혁위원회의 위원으로 투입했지만 별다른 협력을 보이지 않자 다시 판타나우로 돌려 보내게 된다. [[전범|일본군]]은 탄트에게 판타나우에 [[일본어]] 과목을 비롯한 [[일본]]에 협력적인 교육과정 개발에 착수하라고 명령했지만, 탄트는 이를 거부하고 [[전범|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미얀마]]는 [[대영제국|영국령 식민지]]로 다시 귀속된다. 후에 [[1948년]] [[미얀마]]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맞이한다. 누(Nu)는 [[미얀마]] 공화국의 초대 수상으로 취임하게 되고, 누(Nu)는 오랜 세월 동안 협력 관계로 지내왔던 탄트에게 방송부문 장관직에 앉힌다. 하지만 독립 직후 혼란스러운 정치적 환경때문에 누(Nu)의 신정권은 순조롭게 나라를 꾸리고, 이끌어가지도 전에 소수민족들의 반란[* [[미얀마]]의 독립 직후 버마 민주 공화국 연방이 수립되었는데, 나라의 정치 이념을 놓고 분열되어 통합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정치적 분열은 계속 지속되었고, 결국엔 이 혼란스러운 정치적 분열이 내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에 의해 상당히 무거운 정치적 짐을 지게 되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1949년]] 탄트는 정보부 비서관으로 임명된다.[* 정부가 없어진 것은 아니고, 정부 기능이 상당히 손상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정부 내에 인사 작업에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문서를 이해하는 데 착오가 없기를 바람.] 그리고 [[1951년]]부터 [[1957년]]까지 수상의 비서를 지냈다. 수상의 비서를 지내는 동안 수상의 정책에 대하여 자문 일도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비서실장(참여정부 시절)의 사이가 이것과 많이 흡사하다] 그는 [[미얀마]] 관료 생활 이후엔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는 국제 외교관으로 활동하게 된다. [[1955년]] 반둥회의[* 정식 명칭은 "아시아-아프리카회의"로, 보통 "반둥회의"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당시 [[냉전]]시기에 심화되는 긴박한 국제정세를 탈피하고자 평화를 위해 [[제3세계]] 중심으로 만들어진 회의이다.]를 성사시키는 데 한 역할을 하였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 그는 [[미얀마]]의 [[유엔]] 대표부 대표 였고 [[알제리]] 독립에 관한 협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1년]] 탄트는 사무총장이 되기 전까지 [[콩고]] 집행위원장을 지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